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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문학과지성사

70년을 기다렸다! 전 세계 독자가 선택한 현대의 고전 한국 최초 그리스어 원전 번역 “조르바는 내게 삶을 사랑하는 법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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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자키스 글

유재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원래는 열린 책들의 이윤기 번역본으로 읽으려고 했으나, 의도치 않게 유재원 번역본으로 주문해버려서 이걸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글을 잘 옮겨놓은 느낌이 들었다. 원전을 그대로 잘 옮겨놓은 느낌보다는 글이 깔끔해 술술 잘 읽혔다. 이게 카잔자키스의 필력 덕일 수도 있겠지만, 번역가의 공로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재원 번역본도 좋다고 추천해 주고 싶다.


인상 깊었던 구절들 

 

"왜, 왜? 사람들은 도대체 이유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요? 그냥 기분 따라 하면 안 되나요? 예를 들어, 음, 나를 요리사로 데려가쇼. 내가 수프는 좀 끓일 줄 아니까"
나는 웃었다. 나는 도끼질하듯 맺고 끊는 게 확실한 그의 태도와 말들이 마음에 들었다.
p.29

 "그 때는 내 피가 끓어올랐고, 뼈에서 살코기를 발라내는 것만 생각했죠. 늙어서 이빨이 다 빠진 뒤에나 찾아오는 평정심을 갖게된 다음에야 올바르고 온전한 생각들을 하게 마련이죠. 이빨이 다 빠지고 난 다음에 '얘들아, 남을 물어뜯지 마라!'라고 말하는 건 쉽죠. 하지만 이빨 서른 두 개가 다 있을 땐, 젊을 때의 인간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에요. 그래서 인간을 잡아먹죠."
p.47

 "이 세상에 자유가 오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살인과 그런 끔찍한 짓거리가 필요하다니 말이오. 내가 저지른 못된 짓거리와 수많은 살인을 이야기하면 소름이 끼칠 거요. 그런데 그 결과가 뭔지 아쇼? 자유였단 말이오. 하느님이 벼락을 쳐 죽이기는 커녕 우리에게 자유를 줬단 말이오. 난 도무지 아무것도 이해가 안 돼요."
p.49

 "우리 무리 가운데 마케도니아에서 나하고 함께 내려온 요르가로스란 악당 놈이 있었는데,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는 더러운 돼지 새끼였죠. 이놈이 우는 거예요. '요르고로스, 왜 우냐?' 그놈에게 물었죠. 내 눈에서도 수도꼭지가 열린 듯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고요. '이 돼지 새끼야, 왜 울어?' 그런데 이 놈이 나를 포옹하더니 입맞춤을 하면서 계속 어린 애처럼 우는 거예요. 그러고는 좀 진정되는 듯하더니, 그 구두쇠 놈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돈주머니를 꺼내서는, 터키 놈들을 죽이거나 그놈들 집에 들어가서 강탈한 금화들을 자기 발밑에 쏟더라고요. 그러더니 금화들을 한 움큼씩 집어서는 공중에 뿌리기 시작했죠. 알겠소 대장? 이게 자유라는 거요."
p.51

 틀림없이 지금 조르바에게는 우리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화장을 덕지덕지 하고 향유를 바른 할머니로 보이지 않고 그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는 '암컷'으로 보일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서는 개성도 사라지고, 얼굴도 지워지고, 젊었건 폐차 상태로 늙었건, 예쁘든 추하든,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 모든 여자의 뒤편에는 엄하고, 성스럽고, 신비로 가득 찬 아프로디테의 얼굴이 숨어 있다.
 조르바가 본 것은 바로 그 얼굴이었다. 조르바는 그 얼굴을 향해 이야기하고, 그 얼굴을 열망했던 것이다. 마담 오르탕스는 덧없는 하루살이의 투명한 가면일 뿐이었다.
p.83 

 "글쎄, 매주 주말 우리 할머니가 긴 의자를 창가에 끌어다놓고, 거기 앉아서 몰래 숨겨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몇 올 안 남은 머리카락을 빗질하고 가르마를 타면서 누군가 자기를 보지 않나 주변을 살살 훔쳐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우리들 가운데 한 놈이 지나가면 성모 마리아처럼 얌전하게 앉아서 자는 척 내숭을 떠는 거예요. 자긴 뭘 자요! 누군가 자기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주길 기다리는 거죠. 나이가 여든이었다고요! 대장, 여자란 얼마나 요물인지 아시겠소? 난 지금 울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땐 내가 아직 얼간이 바보여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걸 비웃었죠."
p.91

 하지만 초창기에 나는 고집을 피우며 물러서지 않았다. 일꾼들에게 일일이 묻고 이야기를 나누며 벌어 먹야아 할 아이들이며 결혼시켜야 하는 형제자매들, 불구가 된 연로한 부모님 문제까지 그들의 걱정에 대해 빠짐없이 알아냈다.
 "대장, 제발 일꾼들의 신상 좀 캐지 마쇼."
 조르바가 실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안됐다는 마음이 들어 일을 위해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서까지 그들을 동정하게 될 거요. 아마 그들이 무슨 짓을 하건 용서하게 될 거요. 그러면, 하느님 맙소사, 우리 사업은 망하게 될 거고요. 일꾼들은 ㅇ머한 사장을 두려워하고 그래야 일을 열심히 하는 거요. 나긋나긋한 사장은 올라타고 게으름을 피우고 말이오. 알아듣겠소?"
p.101
 
 "그러면 당신은 아무것도 안 믿는단 말이오?"
 내가 화가 나서 항의했다.
 "네,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몇 번이나 말해줘야 해요? 나는 아무것도, 아무도 안 믿어요. 오직 조르바만 믿어요. 조르바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라서가 아니에요. 절대로, 정말로 더 낫지 않죠! 그 놈도 짐승이에요. 하지만 내가 조르바를 믿는 까닭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놈이기 때문이죠. 나는 오직 그 놈만을 잘 알 뿐, 다른 것들은 모두 헛것들이에요. 조르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조르바의 귀로 듣고, 조르바의 위장으로 소화하죠. 다른 모든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헛것이에요. 내가 죽는 순간 모든 것들도 죽죠. 조르바의 세계 전체가 바닥으로 사라지죠!"
 "참으로 이기적이네요!"
 내가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그럼 어떡합니까, 대장? 세상이 그런데요. 먹은 대로 싸는 거죠. 나는 조르바고, 조르바답게 말합니다."
p. 104

 "그네들이 새로운 세상을 볼 것 같소? 그냥 그들에게 이미 익숙하고 길들여진 세상을 그대로 놔두슈. 보다시피 지금까지 잘들 살아왔지 않소. 그냥 살 뿐 아니라 아주 잘살고 있고 자식에 손자들까지 잘 낳고 살아들 가지 않소. 하느님이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해도, 그들은 '하느님께 영광이 있을진저!'하며 아우성을 쳐대죠. 이 가엾은 자들은 거기에 만족해 안주하는 거예요. 그들을 내버려두고 입을 다무세요."
p.117~118
 
 새로운 프로메테우스인 너는 적대적인 어두운 세력이 내린 굶주림과 추위, 질병과 죽음이라는 끔찍한 시련들을 견뎌내고 있지. 내 생각에 너는 스스로를 대견해 하면서 어둠의 힘이 그렇게 크고 강하다는 것을 오히려 즐길 것 같아.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네 의지는 더욱 영웅적인 것이 되고, 상항이 거의 절망적이기에 네 영혼의 투쟁은 비극적 위대함을 얻을 테니까 말이야.
 너는 틀림없이 그런 삶을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맞겠지. 너도 네 몸의 크기에 맞는 행복을 만들어냈어.
p.168
 
 "언젠가 어떤 과학도가 내게 말해줬는데, 우리가 마시는 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아주 조그만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걸 볼거래요. 그 벌레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면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고, 물을 못 마시면 목이 말라 갈증으로 죽어갈 거래요. 대장, 현미경을 깨버리세요. 그 괴물 같은 물건을 던져버리라고요. 그러면 벌레들이 당장 사라져서 시원하게 물을 마시고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돼요."
p.213

 애국한다는 작자들이 보수 없이는 꼼짝을 안 합니다. 나는 애국자도 아니고요, 못 벌어도 그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믿고 당나귀를 거기에 매어놓습니다. 나는 당나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유인이어서 내 당나귀가 뒈질 곳인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당나귀가 토끼풀을 뜯는 천국도 바라지 않고요. 나는 무식쟁이라서 무슨 말을 할지 잘 모르지만, 대장 당신은 나를 이해하실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허무를 두려워합니다. 나는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합니다. 나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기뻐하지도, 나쁜 일이 있다고 섭섭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내게는 터키인들이 아테네를 점령했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p.257
 
 내가 두려운 것은 딱 하나인데, 다른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만, 그게 밤낮으로 나를 가만히 내벼러두지 않습니다. 대장, 나를 겁먹게 만드는 것은 늙는 겁니다. 맹세하건대 바로 그겁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훅! 하고 꺼지는 촛불일 따름이죠.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치욕입니다.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으로 치욕스럽습니다. 그리고 나는 남들이 내가 늙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합니다. 뛰고 춤춥니다. 몸이 아파도 나는 춤을 춥니다. 술 마시고, 취기가 오르고 세상이 빙빙 돌지만, 나는 술에 취하지 않은 것처럼 자세를 꼿꼿하게 하고 버티죠. 땀 흘리고, 바다로 뛰어들고, 감기에 걸려 기침이 나려 할 때, 콜록콜록! 해버리면 시원하겠지만, 창피해서 기침을 억지로 참습니다.
p.259
 
 '이봐, 조르바!' 내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죠. '넌 지금 살아서 천국에 들어온 거야! 여기는 참 좋은 곳이야. 그러니 가만히 여기 있어!'
 대장, 내가 대장한테 한번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죠? 각자가 자기만의 천국을 가지고 있다고요. 대장의 천국에는 수많은 책과 아주 커다란 꿀단지가 있을 거고, 다른 사람의 천국에는 포도주와 우조, 코냑 통들이 있을 테고, 또 다른 사람의 천국에는 영국 금화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겠죠. 내 천국은, 색색깔의 치마와 향수 비누, 스프링 박힌 더블 침대, 그리고 내 옆에 암컷 하나가 있는 이 향수 냄새가 물씬 나는 조그만 방, 바로 여기죠.
p.267

 그에게는 논리니, 예의니, 명예니 하는 인생을 편리하게 해주는 소소한 미덕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심연의 절벽 끝으로 대책 없이 자신을 밀어 넣어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편하고 아무도 바라지 않는 미덕만 남아 있었다.
 글을 쓸 때 참을 수 없는 충동 때문에 펜을 망가뜨리는, 이 무식한 노동자는 유인원에서 갓 벗어난 태초의 원시 인간처럼, 또는 위대한 철학자처럼,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압도당해 그 문제들을 몸으로 직접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 또한 모든 것을 처음 보는 듯이 신기해하며 묻는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기적 같아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무와 바다, 돌, 새를 보면서 놀라움에 입울 다물지 못한다. 이 기적을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나무는, 이 바다는, 이 돌은, 이 새는 무슨 의미를 갖는 거냐고 묻는다.
p.271

 "내가 말입니다, 뭔가를 간절히 바라면 어떤 짓을 하는지 아슈?" 그가 말했다. "그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는 그 생각을 안 할 때까지 질리도록 먹고 또 먹고, 포식하고, 과식합니다. 생각만 해도 역겨울 때까지요. 한번은 어렸을 때, 체리가 먹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 된 적이 있어요. 돈이 없으니 조금씩 감질나게 사먹는데 점점 더 먹고 싶어지는 거예요. 밤이나 낮이나 온통 체리 생각만 나지 뭐예요. 그때마다 침이 질질 흐르고, 정말 고문이었어요. 그러는 내가 창피한 건지, 아니면 내게 화가 난 건지,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체리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나를 가지고 놀면서 바보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자, 어떻게 해야 하지? 밤에 일어나 살금살금 다가가서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죠. 은화가 만져지더라고요. 그걸 훔쳤죠. 아침 일찍 일어나 과수원으로 가서 체리 한 광주리를 샀어요. 그리고 구석에 숨어서 먹기 시작했죠. 먹고 또 먹고, 배가 터지도록 처먹었죠. 그랬더니 배가 거북해지면서 구역질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모조리 다 토했죠. 대장, 다 토했다고요. 그러고 나서는 체리에서 완전히 완전히 해방됐죠. 다시는 눈길조차 주지도 않아요. 난 자유로운 인간이 됐단 말입니다."
p.343

 "조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신부들로부터도 벗어나고, 돈으로부터도 벗어나고, 탈탈 먼지를 털었죠. 세월이 흐를수록 난 먼지를 털어냅니다. 그리고 가벼워집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난 자유로워지고, 사람이 돼갑니다." ...
 "한 때는 이 놈은 터키 놈, 저 놈은 불가리아 놈, 또 이 놈은 그리스 놈 하고 구분했었죠. 대장, 난 조국을 위해서라면 대장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못된 짓을 저질렀다우. 멱을 따고,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온 가족을 몰살하고...... 왜냐고요? 그건 그들이 불가리아 놈들이고 터키 놈들이었으니까죠. 난 자주 '이 악당 놈아, 나가 뒈져버려라! 이 바보 얼간아, 나가 뒈져버리라고!'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저주를 퍼부었죠. 하지만 대장, 이제는 나도 생각을 좀 하고 사람을 보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쁜 놈이다. 불가리아인인가 그리스인인가 하는 게 문젭니까? 이제 내게는 다 똑같아요. 이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만 묻죠... 난 모든 사람이 불쌍할 뿐이에요. 사람을 보면, 비록 내가 잘 자고 마음에 아무런 시름이 없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누구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하느님과 악마를 모시다가 뒈지면 땅에 쭉 뻗고 누울 거고, 그러면 구더기들이 그 살들을 파먹을 거고 ...... 아, 불쌍한 인생!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에요...... 구더기 밥인 고깃덩어리들이라고요!"
p.393~394

 "일 반, 잡담 반, 죄악 반, 선행 반, 이런 식으로 적당히 해치우는 게 오늘날 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망쳐놨죠." 언젠가 조르바가 내게 말했었다. "인간들아, 그만하면 충분히 됐으니 이젠 끝까지 밀어붙여라! 겁내지 말고! 하느님께서는 진짜 악마보다 반쯤만 악마인 놈을 더 혐오하신다!"
p.401

 그러나 마담 오르탕스는 베개 밑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미친 듯이 찾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꼈을 때 장롱에서 뼈를 깍아 만들어 하얗게 빛나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 상을 찾아내어 자기 베개 밑에 넣어두었었다. 그녀는 벌써 몇 년 동안 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상을, 마치 우리가 잘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잘 사는 동안에는 전혀 필요 없고, 오직 심한 병에 걸렸을 때나 찾게 되는 약인 것처럼, 저 장롱 바닥 해진 블라우스와 넝마가 된 주단 천 아래 넣어놓고 잊어버렸던 것이다.
p.449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르바가 화가 나서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자유의 몸이 아닌가요?" 그가 다시 소리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무엇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네!"라고 대답하라. 무언가를 피할 수 없다면, 너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그것의 본질을 변화시켜라! 아마도 이것만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구원의 길일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470

 "조르바, 불쌍한 부불리나를 정말 빨리도 잊는군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목소리가 몹시 거칠게 나왔다.
 조르바는 상처를 입었는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새로운 길, 새로운 계획. 난 지나간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요. 난 미래의 일을 찾을 뿐이에요. 지금, 바로 이 순간, 바로 그것에만 신경 씁니다. 난 스스로 이렇게 묻죠. '조르바,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게냐? 잔다. 그럼 잘 자라! 조르바, 지금 뭘 하고 있는거냐? 일한다. 그럼 열심히 일해라! 조르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여자를 껴안고 있다. 그럼 그 여자를 꼭 껴안아라! 그리고 모든 걸 다 있어버려라, 이 세상에는 그녀와 너 이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나게 즐겨라!'"
 그는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부불리나 생전에 그 어떤 카나바로도, 지금 대장이 보고 있는, 이 누더기 조각을 걸친 조르바 영감이 그녀에게 해준 것만큼의 기쁨을 주지 못했죠. 왜냐고요? 그건 다른 카나바로들은 키스를 하면서도 함대며, 크레타며, 그들의 왕들, 훈장, 집에 놓고 온 마누라 따위를 생각하지만, 나 조르바는 모든 걸 잊고 키스만 하기 때문이죠. 그 계집도 그걸 잘 알고 있었죠. 그리고 나의 지극히 현명하신 분이시여, 여자들에게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진정한 여자들은 남자들한테서 받는 기쁨보다는 자신들이 주는 기쁨을 더 행복하게 느낀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p.473

 모든 것이 우리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가 되었을 때, 우리의 영혼이 끈기와 그럴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오히려 엄청나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악마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한 적이 우리를 쓰러뜨리려고 덤벼들지만 우리는 물러나지 않고 꼿꼿이 서서 저항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힘에 굴복한 패배자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승리자가 될 때마다, 진정한 사나이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긍지와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외면적인 불행은, 보다 더 드높고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는 행복으로 승화된다.
p.506

 "아뇨, 대장! 대장은 자유롭지 않수다. 대장이 매여 있는 줄은 다름 사람들 것보다 조금 더 길기는 하지만 그뿐이오. 대장, 대장은 조금 긴 끈을 갖고 있어 왔다 갔다 하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 끈을 잘라내지는 못했수다. 만약 그 끈을 잘라내지 못하면......"
 "어느 날엔가는 그 끈을 잘라낼 거예요." 내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왜냐하면 조르바의 말들이 아직 아물지 않은 내 상처를 건드려 아팠기 때문이다.
 "대장, 그건 어렵수다. 아주 어려워요. 그러려면 미쳐야 하는데, 듣고 있수? 미쳐야 한단 말요. 모든 걸 걸어야 해요! 하지만 대장, 당신은 머리가 있어 그게 대장을 갉아먹고 있죠. 정신이란 식품점 주인 같은 거요. 장부를 팔에 끼고서는 얼마 들어왔고 얼마 나갔고, 이건 이득이고 저건 손해고, 일일이 기입하죠. 정신은 알뜰한 주부 같아서 모든 걸 포기하지 못해요. 뭔가 하나는 꼭 숨겨 놓죠. 정신이라는 놈은 결코 끈을 놓지 않아요. 절대로! 그 악당은 손아귀에 그 끈을 꽉 쥐고 있답니다. 그 끈을 놓치면 그놈은 망하는 거니까요. 불쌍하게도 사라지는 거죠! 하지만 그 끈을 자르지 않으면, 대장, 인생에 뭐가 있겠수? 캐모마일 차, 맛있는 캐모마일 차 정도? 세상을 뒤집어 엎을 럼주는 절대 아니죠!"
p.521


그리스인 조르바 해설 영상을 3개 정도 읽었는데, 이 영상이 가장 도움이 되었다.

www.youtube.com/watch?v=uvAoVfekELE

 조르바를 이해하려면 니체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알고보니, 가잔자키스가 니체에 심취해서 심도있게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예전에 만난 매력적인 조르바라는 사람에 니체의 초인관(위버멘쉬)를 덮어씌워 새로운 조르바를 만들어 캐릭터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영상에서 위버멘쉬란, 인간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를 깨뜨릴 규범, 관습, 책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위버멘쉬가 되려면 낙타 -> 사자 -> 어린아이의 총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낙타란, 자신의 짐도 아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사막을 건너는 존재이다. 즉, 보통 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반인이다. 사자란, 남의 짐을 나르는 것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사회의 의무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주관적이고 주체적이긴 하지만 항상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불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이다. 이는 이성이 발달하고 자아가 강한 인간을 이야기한다. 어린아이란,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억압받거나 구속되지 않는 순수한 존재이다. 이를 초이성적인 위버멘쉬의 단계이다.

 

 위에서 표시한 인상깊은 구절들을 보면 조르바가 딱 그러하다. 조르바는 지나가다 노새를 보더니 어떻게 이 세상에 저런 존재가 존재할 수 있지? 하며 신기해 하며 즐거워 한다. 갈탄광이 망한 상황에서도 고기를 뜯으며 춤을 춘다. 극한의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즐긴다는" 최선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히피가 아니다.

 

 내가 예전에 왜 동화 작가가 되고 싶었는지도 생각이 들게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들을 정말 많이 기억한다. 그 동화들은 정말 재밌었고, 아직도 좋은 기억들로 남아 있다. 그러다 최근에 동화집 전체를 읽어봤는데, 내 예상보다 그렇게 재밌지는 않았다. 이게 어린아이의 순수함의 힘인 것 같다. 어린아이 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즐거웠던 것 같다. 잠자리 하나만 잡아도 하루종일 가지고 놀기도 했다.(불쌍한 잠자리...) 나는 어린아이들이 순수하게 내가 읽은 이야기를 즐기고 나중에도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사실 책 내용과는 관련이 없지만 어린아이의 순수한 즐거움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영상에서 조르바가 과연 이상적인 인간 상인가 또한 다룬다. 시한책방님은 이 주제에 대해서 이것은 개개인의 해탈에 가까운 이 개념으로 사회, 도덕, 규범 등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그러한 경지에 다다르면 사회, 관계 같은 것들이 별 의미가 없어지면서 그러한 것들이 없는 행복이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한다. 따라서 가족도 버리고, 아무데나 떠돌며, 내키는 대로 하는 조르바의 자유가 마냥 부럽지 만은 않다고 한다.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조르바라는 사람이 매력적이고 어느 정도는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일단 일반 사람들의 기준으로 그의 행동을 봤을 때 조르바라는 양반은 낭만 건달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래서 조르바가 계속 말하나 보다. 자신은 결코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도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라고. 다른 사람이 이렇게 산다면, 그 사람을 바꾸려 들지 말고 그 사람이 사는 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의문이 들었던 건, 대체 그렇다면 조르바가 개, 돼지, 소와 다른 게 무엇이지? 하는 것이였다. 그는 분명 인간이다. 그는 자신을 인간답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인간이라고 하고 싶다. 일단은 그가 짐승과 다른 무언가를 가졌다는 것은 아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인간이라고 하고 싶다는 것에 그치겠다. 그러면서도 조르바는 내내 자신이 짐승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조르바는 인간 짐승 ... 이러한 것에 구분을 두는 것에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것일 지도 모르곘다. 어쩌면 '두목'이 부처를 공부하는 것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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