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느낀 점. 음식이 맛있는 것과 재밌는 것은 다르다. 백종원 선생님은 재밌다는 표현을 맛없을 때 하신다지만, 내가 생각하는 재밌는 맛은 긍정적인 표현이다. 좋은 경험이라는 말에 좀 더 가까울 것 같다.
햄버거 일기
나는 햄버거 먹으러 다니는 걸 좋아한다.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햄버거를 먹으러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가끔은 서울이 아닐 때도 있다.
햄버거 투어 하는 날의 일상은 거의 비슷하다. 사전조사한 버거집에 가서 햄버거를 먹고,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고 가까운 다른 버거집에서 버거를 먹고 집에 온다.
이런 루틴을 거의 6개월 이어갔다. 그럼에도 누가 왜 그런 삶을 살며 햄버거가 왜 좋냐? 라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땐 그냥 좋아요 하는 수밖에 없었다. 버거를 엄청 좋아하는 것보다는 그냥 주말에 할 일이 없어서 주말에 억지로 할 일을 만든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 최근에 먹었던 햄버거들에 대한 기억이 휘발되는 것이 아까워 버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햄버거를 먹고나서 어떤 느낌이 들었고 어떤 것이 좋았고 하는 것들을 적는 것이다.
내가 어떤 순간에 좋음을 느꼈는지 알기
버거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좋은 점은, 햄버거를 먹는 것에 좀 더 '의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먹는 것에 의식하게 되자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내가 어떤 버거를 좋아하는지, 햄버거를 먹으러 다니는게 왜 좋은지 명확해졌다.
버거 일기를 쓰면서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은 버거 일기를 쓰면서 느낀 것들을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버거
햄버거에 입문하게 해준 내인생 최고의 버거인 플레저 버거
내가 좋아하는, 실패 없이 맛있다고 느끼는 버거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좋아하는 버거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체다 치즈 베이스의 선호다. 치즈에 따라 좋아하는 버거 스타일이 다르다.
햄버거에 맛있는 빵의 역할이 아주 크다는 걸 알게 해준 성수망치버거. 국내 버거집중 플레저 버거와 가장 비슷하다고 느껴서 좋아한다.
빵은 버터 번이 좋다. 버터 향이 은은하게 나며, 손으로 잡는 겉부분은 부드럽지만 내용물을 감싸는 안쪽은 바삭할 때 느낌이 좋다. 패티의 육즙과 소스가 빵에 스며들어 있는 것도 좋고, 달걀 노른자가 빵에 적셔져 있는 걸 정말 좋아한다. 그러면서 바삭함이 살아있으면 참을 수 없다. 여러 국물에 잘 절여져야하기 때문에 뚜껑 부분은 납작한 것 보다는 둥근 형태가 더 좋다.
패티는 바삭한 스매시드도 좋지만, 씹는 맛이 적당하게 있는 형태가 좋다. 육향이 적당히 나는 스타일도 좋고, 후추향이 은은하게 나면 더 좋다. 너무 짜진 않되 짭조름한 느낌이 나는 걸 좋아해서 가끔 소금을 뿌려먹을 때도 있다.
패티와 치즈의 조화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파이브 가이즈. 포틀랜드 점이 잘하는 건진 모르겠는데 강남점에서는 좀 실망스러웠다.
치즈는 잘 녹아져 있을 때가 좋다. 기본적으로 체다 치즈가 가장 좋다. 블루 치즈나 소스 형식의 치즈, 모짜렐라 치즈도 좋아한다. 치즈의 존재감이 옅지 않은 버거가 좋다. 치즈는 패티를 씹을 때 잘 섞여야 한다. 패티와 어우러진 꾸덕한 치즈의 느낌과 열기, 육향과 치즈향이 뒤섞인 고소함과 짭조름함. 이 어우러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어우러짐이 좋아 더블 버거를 주문할 수 있으면 가능한 더블 버거를 주문한다.
생적양파의 매력을 알게 해준 브리즈 버거
생양파보단 볶은 양파가 더 좋다. 하지만 짠 버거를 먹을 때 생양파는 나쁘지 않다. 단, 아린 맛이 강하지 않아야 한다. 양파는 많을수록 좋다. 아니 옳다. 적양파일 때는 통양파가 더 좋은 것 같고, 백양파일 때는 잘게 슬라이스한 형태일 때가 더 좋다. 적양파일 때는 통양파일 때 더 먹음직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버거의 정체성은 1. 재료들의 밸런스 2. 먹기 간편함이다. 2의 비중이 적지 않기 때문에 먹기 불편한 버거는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토마토와 베이컨을 선호하지 않는다. 토마토 껍질과 베이컨 끝부분의 질김이 한 입에 끊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 버거의 모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버거는 모양이 흐트러지면 재료들이 한 쪽으로 쏠리기 쉽기 때문에 밸런스가 망가진다. 일부 쉐이크쉑 매장처럼 토마토를 아주 얇게 얹어주는 스타일은 나쁘지 않다. 위와 같은 이유로 부서지기 쉬운 잘라먹는 버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잘 잘리면 상관 없다. 버거의 높이가 중요한 것 같기도 하다.
묽은 소스가 매력적이던 노머시 버거
소스 버거는 맛이 과하지 않되 소스 양이 많았으면 한다. 가장자리에서는 소스를 느낄 수 없을 때 아쉬움을 많이 느낀다. 텁텁한 소스 보다는 적당히 물기가 있어 빵에 잘 발려지는 스타일이 좋다. 케첩은 텁텁함에도 싫은건 아니지만, 찌르는 듯한 새콤함과 단 맛이 신경 쓰여서 두 입 연속으로 케첩을 뿌려 먹고싶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양상추는 짠 버거일 때 있는 게 더 좋다. 식감도 살려주고 치즈와 패티가 섞일 때 적당한 아삭함과 수분감이 시너지를 준다. 다만 빵의 가장자리에서 과하게 튀어나오지 않아야 하고, 굴곡이 커서 높이가 높아선 안 된다. 먹기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얇은 것으로 한 장 정도가 적당하다. 아삭함을 강조하려고 층고가 높은 양상추를 얹어주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내 생각에 그건 양상추의 역할이 아닌 것 같다. 양상추로 버거의 층고가 높아지면 먹기 위해 누를때 양상추가 부서지면서 햄버거 내용물이 튀기 쉬워 좋아하지 않는다.
할라피뇨의 식감을 잘 살렸던 알지비 버거
할라피뇨와 피클도 좋아한다. 양상추와 할라피뇨 피클은 각각 다른 아삭한 식감을 준다. 가는 그중 할라피뇨의 식감을 가장 좋아한다. 가장 아삭한 식감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라피뇨가 흐물한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피클은 케찹 소스와 있을 때 가장 잘 어울린다.
사이드를 먹을 바에야 햄버거 2개를 먹는게 더 좋다. 예외가 있다면 웬디스의 감자튀김 정도. 웬디스는 감자튀김을 먹으러 갈 정도로 좋다. 미국에 있을 때는 일기를 쓰지 않아서 왜 좋은지 적지 않은게 아쉽다. 미국에 다시 돌아가면 웬디스 감자튀김의 어떤 것이 좋았는지 생각해 봐야겠다.
제레미 버거
감자튀김은 얇고 흐물텅한 것도 좋고, 두꺼우면서 각지고 포슬포슬한 것도 좋다. 과하게 바삭바삭한 건 좋아하지 않는다. 입이 다 까지는 느낌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각져서 포슬포슬한 건 나쵸 치즈 같은 치즈가 듬뿍 뿌려진 걸 먹는게 좋다. 거의 유일하게 햄버거 2개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이드다. 칠리 같은 게 추가로 올려진 것보다 치즈만 올려져 있는게 좋다. 흐물텅한 느낌의 감자튀김은 맥도널드 스타일이 좋다. 식지 않은 온도와 함께 짭조름함을 느끼는 것이 좋다. 그래서 케첩은 안 뿌려 먹는다. 그렇지만 감자튀김을 버거에 넣어먹을 때 케첩이 섞이는 것은 좋다.
세븐 버거스 어 위크
햄버거와 콜라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느끼할 때는 괜찮긴 한데 그것보다는 알코올류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맥주와 가장 잘 어울리는 듯 하고, 위스키도 괜찮다. 탄산음료는 루트비어가 가장 좋다. 그 외 대부분의 경우 그냥 맹물이 낫지 않나 한다.
재밌는 버거는 맛있는 버거와 다르다
최근 패티앤 베지스라는 버거집에 갔다. 주문한 것은 위에서 내가 좋다고 말한 체다 치즈 버거는 아니었고 블루 치즈 버거였다.
버거 메뉴를 둘러보다 보니 버스키라는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요즘 위스키에 입문해서 가끔씩 먹어보는 터라 사장님께 맥켈란을 추천받아 함께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면서 사장님은 위스키를 한 잔 더 주셨다. 발베니였는데 이것도 초심자들이 입문하기 좋은 위스키라면서 한 잔 내주셨다. 공짜라서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여태 마셨던 위스키 중에 가장 입에 맞았다.
햄버거가 나오고 먹자마자 충격을 받았다. 맛도 정말 좋았지만, 사장님께서 재료들의 어우러짐이 메뉴 개발에 정말 신경 쓰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티앤베지스
패티가 정말 두꺼워서 육향이 부담스럽거나 느끼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지만 입에 넣었을 때 매운 시즈닝인지 알싸한 향과 함께 무화과의 달콤함 때문인지 전혀 과하지 않았다.
무화과가 톡톡 터지는 느낌에 집중하니 같이 들어있던 견과류의 고소함에 느끼함은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견과류도 매끈하고 얇아서 아몬드인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알려주길 설탕에 튀긴 호두라고 알려주었다.
빵도 버터번이 아닌 호밀빵에 가까웠다.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치즈가 크림치즈와 같은 질감이라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평소 내가 맛있다고 느끼는 버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여태 방문했던 버거집 중 최고점을 주었다. 그때 맛과 취향만이 좋음을 결정하지 않음을 결정하지 않음을 느꼈다.
바의 분위기(적당히 시끄럽고 어두웠고, tv에서는 온갖 영화에서 나온 술 마시는 장면을 짜깁기한 영상이 계속 나왔다), 버거의 구성을 통해 만드는 사람이 먹는 사람에게 주고싶었던 느낌, 적당히 더운 온도, 주말에 가게를 찾아가려고 열심히 걸은 것들 등 여러 것들이 영향을 미치는구나 싶다.
프랜차이즈 버거 보다는 수제버거가 더 좋은 이유
귀여운 벅벅
버거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후 프랜차이즈 버거 보다는 수제버거집을 찾게 된다. 수제 버거집에서는 버거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가 좀 더 담겨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러한 재료들을 쓴 이유는 어떠한 식감을 주고 싶었고, 먹는 사람이 어떤 맛을 느꼈으면 하고 이런 것들이 담겨 있을텐데 자신이 개발한 메뉴여야 이런 것들이 좀 더 명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맛을 떠나서 이런 이유들을 추측하는 것이 재밌고 새로운 배합들을 알아가는 것도 재밌다. 맛만으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프랜차이즈 버거와는 다른 이유가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프랜차이즈 버거들도 싸고 맛있다. 그런데 기계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의도들이 만드는 사람들에게까지 전달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좋아해서 수제버거집을 더 선호한다.
그래서 수제버거집을 가도 가능하면 시그니처 메뉴를 시키고, 첫번째 방문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토마토를 빼지 않는다. 사장님의 의도는 넣는 것이 더 맛있겠다고 생각하셔서 넣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햄버거를 즐기는 정도에 그치지만, 사장님은 매일 햄버거를 굽는 분이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버거에 대한 앎이 압도적으로 많은 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장님의 의도를 존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버거를 만들어 주시는 것에 감사함도 있다.
누군가가 보면 그냥 햄버거 먹는 것에 호들갑 떠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사실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에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고 느낄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사는 것이 더 즐거움을 최근 깨달았다. 나는 그냥 좋아하는 것에 호들갑 떨면서 살기로 했다.
끝으로
고든램지버거
좋아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라는게 와닿기 시작했다. 시간을 똑같이 들이더라도 좋아하는 것에 더 노력하면 더 큰 즐거움이 다가오고 색다르게 다가옴을 느꼈다.
평소 일이든 취미든 건성건성 지나치는 것들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지금에라도 현재 가진 것들을 더 잘 느끼고 집중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버거 일기 말고도 다른 여러 일기를 적어볼까 한다. 주제를 꼭 적어야 하는건 아니고 비정기적으로 드는 생각들을 조금씩 정리해 보고 주말에 정리해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특히 인간관계에 대해서 일기를 적어볼까 한다. 요즘 관심있는 주제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서 그 사람이 듣고싶은 걸 캐치해서 그것에 말 해주기(아부가 아닌 대화의 맥락 잡기)인데, 일기가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글도 자주 써야겠다. 최근 저맥락 대화 능력을 기르는 것에 관심이 있는데, 이 글 하나 쓰면서 여러 번 다시 읽어보면서 느낀건, 정말 앞의 맥락 없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저맥락 소통하는 법의 힌트를 글쓰기에서 찾은 것 같다. 글쓰고 다시 읽어보면서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수정하는 걸 반복해보면 좋은 훈련이 될 것 같다.